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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의 자해적인 고통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누군가 하이힐을 신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성 발톱과 각종 관절염 등을 유발하는 하이힐은, 발 전문의 관점에서는 비실용적이고 골칫거리의 전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과 역사가 지속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은 실제로 매우 복잡하고 문화와 수용 가능한 행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신발은 변화하는 패션과 권력, 계급, 젠더와 관련된 신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하이힐은 섹슈얼리티와 여성다움의 상징이자, 순수한 욕망과 자기 과시의 광적인 표현입니다. 하이힐의 기원은, 원래는 걷기에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을 위한 실용적인 신발로 만들어졌습니다.

 

놀랍게도 하이힐은 일종의 승마용 부츠로 동유럽에서 유래했으며 오늘날의 블록 굽 카우보이 부츠와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마 궁수로 기억되는 페르시아 군대는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말을 탄 채로 적에게 돌격할 때, 안장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습니다.

 

‘하이츠 오브 패션의 저자’이자 토론토 바타 신발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 엘리자베스 셈멜핵이 BBC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군인들이 말안장에서 등자로 일어섰을 때, 발뒤꿈치는 그가 활과 화살을 더 효과적으로 쏠 수 있도록 그의 자세를 고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 

 

다양한 무역관계와 여행을 통해, 페르시아 하이힐패션은 특히 1599년에 샤 압바스 1세가 보낸 외교사절단덕분에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매우 남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페르시아 하이힐의 변종들은 곧 귀족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호화로운 팬 중 하나는 고급스러운 빨간색으로 물든 4인치(10cm) 힐을 신고 늘어닌 키를 뽐낸 루이 14세였습니다. 영국의 찰스 2세도 그의 1661년 대관식 초상화에서 빨간 구두를 신었습니다. 17세기의 남자들은 타이즈, 화려한 반바지, 하이힐을 사용하여 종아리와 다리를 자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시대는 높은 지위와 특권이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증명된 시대였습니다. 특히 하이힐은 이 장식품 목록의 맨 위에 있었습니다. 곧이어 귀족 여성들도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현장의 노동자들만이 편안한 신발을 신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와 함께 남성 패션이 더욱 기능적이 되었을 때 여성 패션은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습니다. 바타 신발 박물관이 큐레이팅한 전시회에서 “위대한 분수령”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남성은 하이힐을 신지 않고 여성의 힐은 더 크고 뾰족하고 섬세해졌습니다. 즉, 여성들의 하이힐은 '약하고' '비합리적인' 여성성의 이상향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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